1만 1천 권의 조선, 몽골을 거쳐 베이징까지의 여행 - 담양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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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 / 2022. 11. 27. 20:00

1만 1천 권의 조선, 몽골을 거쳐 베이징까지의 여행

러시아 선교사와 연행사

팀콥스키의 책 몽골의 거쳐 베이징까지의 여행』은 1728년에 체결된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조약의 5조는 러시아 정교의 포교에 관한 것으로, 러시아 사제들은 베이징에 거주하며 포교를 할 수 있고, 청나라 정부는 장소와 거처와 비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네 명의 선교사와 세 명의 수사 등으로 이루어진 팀콥스키 일행은 이 조약에 의거하여 이제 베이징으로 떠나는 참이다. 1820년 8월 말의 일이다. 장장 4개월에 걸쳐 몽골을 통과해서 가는 긴 여정이 될 이 여행의 끝은 아라사관, 당시의 조선인들이 부르는 명칭으로는 그러했고, 더 멀리 올라가서는 '옥하관'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1689년,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국경 분쟁을 매듭짓는 네르친스크조약이 맺어지면서 베이징에 러시아 사신들의 숙소가 필요해지기 전까지 이 아라사관은 조선 사신들의 공관이었고, 그 명칭이 바로 옥하관이었다. 비록 러시아인들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조선의 연행사들은 그곳에 대해 각별한 마음이 없지 않았던 듯하다. 당연한 일이다. 명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조선의 외교 역사가 거기에 전부 깃들어 있었으니. 그래서인지 연행사들은 자주 옥하관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옥하 변에 서서 아라사관이 된 곳을 그저 바라보기도 하고, 아라사관의 문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들어가서 아라사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곳의 푸 ㅇ경에 대해 세세한 묘사를 남기기도 했다. 아예 아라사관기를 쓴 사람도 있다. 1832년에 동지사 겸 서장관으로 베이징에 다녀온 김경선이 그다. 그는 연원직지라는 제목의 연행록을 쓰면서 그 부록에 아라사관기를 덧붙였다. 아라사관과 아라사관에 속한 러시아 교회의 풍경을 건축양식부터 구조까지 상세히 소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마당의 개 한 마리까지 글로 남겼다. 

 

대한민국 선교사, 십자가

아라사관에서 이루어진 필담

아라사관은 그림으로도 남겨졌지만 오히려 글로 쓴 아라사관이 더 생생하다. 그림은 건조하게 구조물만을 그려놓았으나 글은 꽃나무 한 그루, 개  한 마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 아라사관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조선인들과 러시아인들의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도 남았기 때문이다.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러시아 정교 전도단의 신부 비추린과 그의 보조관이었던 젊은 외교관 팀콥스키가 바로 그들이다. 특히 팀콥스키는 그의 책 몽골을 거쳐 베이징까지의 여행에서 아라사관을 찾아온 조선 사신들과의 만남을 세세히 기록해두었다. 팀콥스키는 조선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행동에 호감을 보이며 몇 가지 선물을 했다. 접이칼, 찻잔, 페테르부르크에서생산한 종이 등이었는데, 그중 조선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종이였다고 덧붙였다. 정말로 그랬을까. 선비들이니 그랬을 것이다. 그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에서처럼 그가 진심으로 갖고 싶었던 것은 총이었다. 그걸 선물받지는 못했다. 대신 사브르라고 불리는 기사용 장검을 선물 받았다. 역시 귀한 선물이었다. 그 귀한 선물을 옆으로 슬쩍 미뤄두고 러시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1821년 이조원은 동지사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위에서 기록된 그는 바로 이조원이고, 세 명의 조선인 관리들은 이조원을 수행하고 온 일행들이었다. 이 사신단과 러시아 정교회 신부, 그리고 외교관이 연속적으로 몇 차례에 걸쳐 아라사관과 정교회 교회에서 만났다. 중국어 통역을 사이에 두고 필담이 오고갔다. 

 

비추린이 전하는 조인영의 시 

러시아 전도단은 포교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고, 만주어를 익혔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를 배웠고, 중국의 역사와 정책을 러시아어로 번역했다. 당연히 이 중에는 비밀리에 수집된 기밀문서도 있었다. 비추린은 신부이면서 학자이기도 했는데, 러시아로 귀국할 때 그가 수집해서 가져간 동방 관련 자료가 자그마치 책 12상자, 지도 6통 등 총무게 1만 4,000파운드였다고 전해진다. 이 자료들은 이후 러시아 내 동방학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비추린이 만난 사람 중에는 조인영도 있었다. 이조원보다 몇 년 후인 1827년, 무관의 청년이었던 조인영은 사신단을 쫓아 베이징에 갔다가 러시아 신부이자 탐험가 니키타 비추린을 만났다. 헤어질 때 시 한 수를 지어 비추린에게 선물했는데, 그 시를 비추린이 러시아까지 가져갔다. 수없이 많은 시를 선물 받았을 텐데, 비추린은 왜 굳이 그걸 가져갔을까. 조인영은 나중에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과거급제조차 하지 못한 한낱 청년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이 준 시를 비추린이 가져갔고, 소장하고, 훗날에까지 전했다. 다음의 시다.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같은 하늘 아래 있다네 

먼 훗날 그리울 때면 

천마를 타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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